R梧下
R梧下
나의 언어와 나의 생활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경계한다. 그러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역시 또 다른 매너리즘임을 이내 발견한다. 빠지지 않으려 함의 동기는 탈출의 욕구이다. 금잔디 뿌리만큼이나 뻔뻔하게 뻗어나는 鬪魂의 轉形이다. 무엇인가로부터의 해방 – 그것은 기존의 criteria로부터의 해방을 內包한다. – 은 더없이 흠쾌(欽快)한 일이다. 굳이 일례를 지적한다면 말구유에서 탄생한 예수의 출생은 역시 통념을 배제하기 때문에 그 자리가 누추하다는 사실에 勝하여 큰 매력을 지닌다.
이러한 질곡으로부터 탈출이나 해방은 확실한 ‘나의 인식’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사람들은 그의 personality의 형성과정에서 그와 함께하여 사회를 구성하는 타인과의 동질성보다는 오히려 이질성을 더 많이 찾아내는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차이를 발견함을 단순히 한 몸의 손가락도 각기 다르다고 하는 것처럼 個體的 非同質性으로 느낄 뿐이며, 이를 주춧돌로 하여 뭇 인간들 틈의 ego에 대한 발견을 간과하며, 그리하여 나아가서 창조적 생활인의 자세를 상실하게 됨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의 이질감은 Exodus의 활력소를 배양하지 못하므로 반대로 保守症을 발병시키는 요인이 되며, 동태적으로는 보수는 복종을 낳고, 또 복종은 矮小를 잉태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보수 내지는 왜소의 증세는 세파에 부대낀 젊지 않은 이들의 運命的 配當이라고 생각되어 왔는데 비해, 요즘은 되려 젊은 녀석들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어 보아도 금새 날로 益甚해지는 早老性 왜소를 진찰해 낼 수 있다. "13인의 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같은 烏瞰圖的 불안을 느낀다.
캠퍼스가, 다방이 그리고 12칸 팔달로가 미증유한 small-size의 무대와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와 그리고 시청 앞 네거리에서 파는 10원짜리 쥐고기만큼이나 납작하고 쬐꼬맣게 눌린 녀석들로 메워지는 게 슬프다. 뿐이랴, 이런 풍속에 악감정을 가진 나까지 왜소해지는 것 같아 결정적으로 슬프다. 우린 삽혈(歃血)하여 맹세할 필요가 있다. "나를 지키자. 그리고 탈출하자"고.
(1978. 3. 24)